어릴적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서부터 기본적인 심성이 바른 것을 뜻하기도 하고, 성장하면서 마음이 변할 필요가 없었을만한 안정적인 환경에서 배움의 기회를 갖었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위대한 사람은 본인 스스로와 주위여견과 사호의 조화가 이루어질 때 나오는 것이리라!
그리고 어릴적 마음중 가장 유지하기 힘든 것은 "호기심"이 아니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놀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들에게는 꼭 놀아야 한다는 기본조건이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는 준비가 된다.
마음놓고 휴식을 취하도록 하자!
결국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사람이군요 ^^
하지만 세상 사람 모두가 위대한 사람이지 않은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속이고, 자신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이겠죠..
알고있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실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위인들은 정말 위대한 사람이지 않나 싶어요
동물과 식물의 분류는 중학교 1학년 때 배운다. 식물이 처음 발생해서 새로운 생존방법을 하나씩 추가해서 진화했기 때문에... 하나씩 추가 혹은 변경하면서 진화한 순서대로 생각하면... 사실상 별로 외울 것은 없는 편이다. (뭐 하지만 동식물 이름 등등을 외울 것이 무수히 많지만.. -_-)
대나무 꽃???
우리가 중학교 1학년 때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기에..... 이 사진이 대나무꽃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꽃의 형태로 봐서 이 꽃은 속씨식물일 것으로 생각된다. 대나무의 풍매화 보다는 훨씬 더 진화한 쪽에 속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풍매화가 바람한테 잘 보일려고 저렇게 이쁜 꽃을 만들었을까?
꽃의 진화는 매개체를 제한적으로 바꿈으로서 좀 더 적은 꽃가루를 만들어 에너지를 줄이면서도 수정 확률은 높도록 진화되어 왔다. 마다가스카르 섬에 존재하는 한 꽃의 꿀샘의 깊이가 30cm나 되는 것을 보고 옛날 어떤 유명한 생물학자가... 주둥이 길이가 30cm나 되는 동물이 존재할 것이라고 추측한 것도 그와 같은 추론의 결과였을 것이다. (현재는 공생관계인 이 두 생물 모두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_-)
저런 정도를 왜 아무도 확인해 주지 않을까??
과학은 특별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외우라는 부분은 별로 없다는 걸 아이들에게 느끼게 해 줬으면 좋겠다.
진보와 보수는 모두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위해서 진보와 보수는 각자 자신의 패러다임을 주장할 뿐이다. 만약 이런 전제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그건 진보와 보수가 아니라 이기주의일 뿐이다.
교육이란 한 사람에게 가치관과 지식에 기반한 패러다임을 부여하여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한 사람’이란 각각의 개인을 의미하기 때문에 ‘개성’과 ‘특질’이 각기 달라서 어떠한 한 기준으로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도저히 그 참신함의 범위를 예측하지 못하는 것은 각각의 학생의 사고 범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기 때문이 아니라 학생들의 사고의 중심이 선생들의 사고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교육은 한 개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옳은 교육론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여기서 ‘보수’적인 관점이라는 것은 하나의 교육방법(제도, 지식, 실무 등등)을 적용할 때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해서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다. 즉 교육방법 자체가 보수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만약 진보와 보수의 입장에서 교육을 논하려면 어떤 제도를 적용하려 할 때 그 교육방법이 진보적이냐(바꾸려고 하냐?) 보수적이냐(안 바꾸려고 하냐?)를 따져야 하는 것이다. 교육방법의 효용성이 있을 것인가와 언제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논하는 싸움은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서 싸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 개인(학생)을 교육하려 할 때 진보적인 방법이 더 유용할 것이냐 보수적인 방법이 더 유용할 것이냐에 대한 논쟁은 해묵은 논쟁이면서 매우 중요한 논쟁이다. 그러나 영원히 논쟁의 결말이 나지 않을 그런 논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사회상과 개인(학생)의 ‘개성’과 ‘특질’에 따라서 사용해야 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 시대에 한 개인(학생)을 가르칠 때 사용할 방법은 진보도 보수도 아니고 그 학생에게 적합한 방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학생에게 적합한 교육방법을 모두 찾게 된다면 그 결과는 진보적이 될까 보수적이 될까? 누구나가 다 알다시피 각각의 학생에게 적합한 교육방법은 진보와 보수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게 된다. 그 이유는 통계학에서 사용하는 정상분포곡선에 따라서 학생들이 분포하기 때문일 것이고, 최대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는 양 극단보다는 어느 정도 중간쯤이 더 좋은 위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진보와 보수가 양 극단에서 싸우는 이유는 그 두 힘이 어느 정도 평형이 되어갈 때 그 위치가 최대다수의 이익을 얻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현재 서울의 교육감 선거에서는 크게 3파전이 이뤄질 예정이다.
첫 번째는 1번인 공정택 후보인데, 극우의 한나라당의 지원을 공공연히 받고 있다. (만약 그 대상이 한나라당이 아니었으면 분명 선거법위반으로 문제가 상당히 시끄러울 그런 상황이다.)
세 번째는 6번인 주경복 후보인데, 극좌인 전교조의 지원을 공공연히 받고 있다. 주경복 후보 측의 전교조와 다른 단체들은 주경복 후보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으로 나서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전교조는 교사로서 공식적으로 지지를 표면화할 경우 공무원법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5번 이인규 후보인데 ‘반이명박, 반전교조’의 슬로건으로 극우와 극좌를 동시에 비판하고 대략 중간적인 공약을 내놓고 있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이인규 후보의 공약도 잘 안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내가 그동안 경험한 교육에 의하면 이인규 후보의 공약들이 가장 나아 보인다.[각주:1]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정택 후보와 주경복 후보는 극우와 극좌 성향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진보와 보수의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공정택 후보의 공약들을 살펴보면 뭔가 이상한 것을 알 수 있다. 메인에 내놓고 있는 공약들은 모두 훌륭한 공약들이지만 세부적인 내용들의 공약은 메인에 내놓고 있는 공약들과 상반되는 경우가 많다. 메인에 내놓고 있는 공약은 추상적인 내용들이고, 세부적인 공약들이 구체적인 내용들인 것을 고려하면 결국은 공정택 후보의 공약들은 세부적인 공약들을 추진하기 위해서 메인에 내놓은 때깔 좋은 공약들로 포장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주경복 후보의 공약들은 거의 대부분이 전교조의 공약과 일치한다. 전교조가 암암리에 주경복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주경복 후보의 공약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는데 도대체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전교조가 적성단체, 이적단체로 찍히면서 고생하던 때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였다. 거의 20년 전..... 그런데 지난 20년 동안 전교조의 주장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사회가 변해가면 그에 맞게 주장도 변하기 마련이련만 전교조는 그 부분이 부족하다. 그 덕분에 오늘날의 전교조는 초기의 전교조와 비교해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고,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그러나 전교조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대다수의 회원들은 아직도 순수하게 좋은 교육을 위해 자신의 피해를 감수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주경복, 공경택 후보와 대결하고 있는 이인규 후보의 공약은 양호하다고 할 수 있다. 공정택 후보의 단점인 이기주의, 주경복 교수의 변화가 없는 시대에 뒤떨어진 주장에서 장점을 적절히 뽑아 섞어놓았기 때문이다.[각주:2] 이러한 혼합은 이인규 후보의 면면을 살펴보면 좀 더 확인할 수 있다. 아직 40대인 이인규 후보는 아직도 젊은 패기를 유지하고 있고, 또한 여러 학교의 교감을 지내면서 몇몇 성과를 내놓은 적이 있다. 이런 면은 건국대 교수를 지내면서 교수로서의 책임을 기만한 채 오래전부터 정치교수의 길로 들어선 주경복 후보[각주:3]와 오랫동안 교총에서 활동하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를 거부하는 타성에 젖은 공정택 후보와 비교되는 장점이다. 물론 이런 것이 꼭 장점이 될 수 없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의 경우처럼 간혹 위험을 알면서도 밀어붙이기를 할 수 있는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하겠다.[각주:4] 하지만 미국에서 40대에 대통령에 당선된 딱 두 명밖에 없는 케네디 대통령과 클링턴 대통령의 대내외적인 평가가 매우 훌륭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위험성을 감수한 결과가 별로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 고무적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보수와 진보, 그리고 각각의 후보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른 면을 살펴봤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진보, 보수를 떠나서 이기주의를 우선 배제한 뒤에 지지후보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공정택 후보를 지지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암기위주 교육의 피해자로서 위로해 주고 싶어진다.
ps. 정확한 공약에 대한 내용들은 나중에 구체적으로 살펴봤으면 한다. 하나씩 들여다보면 내가 이 글에서 왜 세 후보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해 놨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이 글과 앞으로 쓸 글을 읽는다고 모든 분들이 내 생각에 동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지만, 최소한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정도는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원래 내 교육관 자체가 이인규 후보의 것과 거의 유사했던 것 같다. 그런 건 내가 이전에 썼던 꽤 많은 (약 200개의) 글들을 읽어보면 금방 알게 될테니 굳이 이런저런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좀 더 엄밀히 생각해 보자면 공정택 후보와 주경복 후보를 극우와 극좌로 나눌 때 이인규 후보는 중도가 아닐 수 있다. 세상은 다원화되어 있고, 극우와 극좌라고 해도 끝과 끝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 후보를 기하학적으로 놓는다면 일직선이 아니라 직각에 가까운 둔각삼각형 정도 되지 않나 싶다. [본문으로]
혹자는 이인규 후보를 박쥐같다고 주장하는데, 박쥐는 카멜레온처럼 주장을 바꾸는 경우에 비유하는 것이지 한 주장을 계속 유지하는 경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본문으로]
주경복 후보는 지난 학기에 수강생 전원에게 올A학점을 준 덕분에 내부 인사위원회에 회부됐다고 한다.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가 있는 후보다. [본문으로]
그럼 늙어 쪼그라든 상태에서도 귀 다 막고 강제로 밀어붙이기를 하고 있는 이명박은 뭐냐? -_- [본문으로]
이 글은 위의 책을 읽는 도중에 작성된 메모를 옮기는 것이며, 이 책에 대한 평은 아니다. 책에 대한 평은 이 글을 읽으시길 바란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점 - 적성
- p.33을 읽다가...
인간의 능력은 대단히 평등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같은 능력 혹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각주:1] 하지만 인간의 모습이 제각기 다르듯이 능력도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결국 인간이 어떤 능력을 갖고 발전하느냐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뛰어난 능력을 발견해 줄 수 있는 (정신적) 스승과 교육시키는 사회적 분위기와 시스템이 필요하다. 보통 천재들은 그 사람의 능력이 공부와 연관이 있을 때 많이 발견된다. 일반인들도 뛰어난 부분이 당연히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 뛰어난 점이 공부와 상관없는 생업/취미 등의 부분과 관련 있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한 분야에 천재성이 있다면 그 방면의 문화가 급격히 발전하여 대부분의 천재성은 곧 평범성이 되고, 극히 일부분만 천재성을 유지할 것이므로 천재들이 한 분야에 집중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천재성을 발견하는 것은 그 분야가 어떤 분야이건 간에 무척이나 힘들다. 천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진짜 천재는 거의 없는 것은 진짜 천재를 만나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좀 잘 하는 사람을 천재라고 말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일단 천재이기보다는 범인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천재는 어떠한 경우에도 든든한 기초 위에서 진정한 위대성을 밖으로 뿜어내므로 예체능계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조기교육은 사실상 별로 필요가 없다. 유치원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숫자를 가르치고 복잡한 개념을 가르치는 것은 기초인성을 형성하고, 자연스러운 기본개념을 형성하는 것에 방해만 된다. 결국 극성인 학부모들의 자녀는 겉으로 보기에만 똑똑한 아이(한마디로 발랑까진 아이)로 성장하게 되고 성인이 되어가면서 아주 좁은 "사고의 틀"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사실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일 것이다.
참고로 대부분의 엄청난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은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천재성을 나타낸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가우스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인 흔치 않은 경우다. (그는 3살 때 암산으로 아버지의 회계장부를 보면서 틀린 곳을 지적해주곤 했다고 한다.) 뉴턴은 비교적 조기에 천재성을 보인 경우이지만 그 나이도 중고등학교 때부터였다. 결국 이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과학자들의 천재성은 초기에는 파악되지 않다가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일부러 천재성을 밖으로 뽑아내지 않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아이가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다른 어떤 글에서 이미 이야기했지만 천재성이란 자신의 재능과 좋아하는 것이 일치했을 경우 나타나는 것이다.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강제로 시키면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 그냥 놔두면 사람의 대뇌작용이란 것이 하기 쉬운 것을 쫒아서 하게 되어있으므로 스스로의 재능을 쫒아서 하게 되어있다. 부모들이 다양한 환경을 접하게 해 주면 그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맞는 방향을 스스로 찾게 되어있다.
주의할 점은 천재들에게는 참 특이한 괴벽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천재성을 발휘하기 위한 기본적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괴벽을 만드는 일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직교좌표계를 만들어 뉴턴에 큰 영향을 끼친 데카르트는 늦잠이 많아 학교에 늦기 일쑤였고 성적도 안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부모나 선생님은 그의 그러한 면을 별로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p.35) 아인슈타인도 학교 다닐 때 그리 좋은 성적은 아니었고, 대학교 다닐 때도 수업을 듣는 것보다 도서관에서 혼자서 책과 씨름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특히 물리학 실험을 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천재들에겐 범인이 이해하지 못할 괴벽이 많으니 진짜 천재를 키우고 싶다면 괴벽은 괴벽으로 인정해 줘야 한다. 물론 괴벽이 있는 아이들은 부모들과 선생님들이 다루기 힘들기 때문에 많은 고충이 따르겠지만 이 고충은 부모와 선생님과 사회제도가 스스로 만든 것들이다.
"열성"과 "극성" 차이
- p.36을 읽다가...
무엇이든 최선을 다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최선을 다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열심히 갈고 닦는 사람만이 미래를 내다보고 다른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갈고 닦은 후에 보이는 길로 다른 사람들을 이끌면 우리는 이런 것을 "열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열성적인 사람들과 비슷한 "극성"인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픈 것을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갈고 닦기보다 자신을 과감히 던진다. 간혹 이러한 도박에 성공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십중십은 실패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오랜 지속성이 있어야 하는데 자신을 투자하면 지속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 가정에서는 한 달에 수십만 원~수백만 원짜리 과외를 10년간 지속시킬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수십만 원짜리 유치원에 보내고 수십만 원~수백만 원짜리 과외를 시킨다. 이러한 "극성"은 현재 세계적으로 '맞벌이' 형태로 나타난다. 맞벌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자녀양육을 고려하지 않은 맞벌이는 문제가 된다!!
극성의 폐해는 그 부모들에게만 결과를 보이지 않는다. 그 자손들도 삐뚤어진 인성과 시각을 갖게 됨으로서 무너지고 그에 더 나아가서 또다시 그 자손들도 그 영향을 받는다. 결국 앞뒤 안 가리는 "극성"은 "병적인 집착"과 같다. 집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사실상 별로 없다. 그들은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상업적인 희생양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구제하려면 정부의 시스템이 그들을 상업적 구렁텅이에서 끄집어내야 하는데 실제 정부의 정책도 이익집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때문에 상업적 구렁텅이는 쉽게 약해지지 않는다.
자신이 극성인지 열성인지를 살피는 것이 자녀교육의 첫 단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어쩌면 열성과 극성의 차이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둘은 분명 다른 면이 존재하고, 극성스런 모습과 열성적인 모습은 아이들의 내재된 잠재의식 속에 꾸준히 축적되어 갈 것이다.
이 축적된 모습은 결국 그 아이가 성인이 된 다음에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것이다.
어쩌면 극성스럽게 살아가는 부모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을 직장인들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열성적인 사람들을 극성스럽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어제(7월 3일) <적벽대전> 시사회를 다녀온 뒤에 오늘 새벽에 감상문을 작성하여 공개했다. 늦게 올릴 필요가 전혀 없는 것 같아서 글을 작성한 뒤에 한 번 뜸들여 다시 읽어본 뒤에 그대로 공개했다. 그리고 이 글은 다음 블로거뉴스 베스트에 그대로 노출됐다.
<적벽대전> 감상문에 오늘 저녁에 미묘한 어휘의 댓글이 하나 달려서 댓글을 단 것이 실시간 댓글이 되어버렸다. 댓글은 한 번쯤 읽어봐도 나쁠 것은 없을듯 싶어 원본은 삭제하고 캡쳐한 것을 대신 이 글에 남긴다.
거의 실시간으로 댓글을 서로 달았는데, 이 댓글을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 이 글을 작성한다.
세상에 '반드시'란 것이 있을까? 쉽게 생각하자면 '1+1'은 왜 '2'일까? 사실 알 수 없다. 가장 명료하다는 수학마저 기본적인 내용에는 '반드시'가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반드시'가 통하지 않고, 논리학이 시작되는 명제들을 수학에서는 공리라고 부른다. '그럴 것 같은데, 막상 잘 모르겠다' 싶은 것들을 공리라고 부르는가보다.
그와 마찬가지로 '독서'에 있어서는 '반드시' 또는 '필수'같은 단어들이 통용될 리가 만무하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삼국지』 또는 『삼국지연의』가 좋은 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책이니까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책이 비록 내게는 엄청나게 지루해서 쓰레기처럼 여겨졌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필수가 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삼국지』 한 권 안 읽었다고 해서 뭐가 크게 잘못 되겠는가? 잘못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삼국지』를 읽은 사람은 『삼국지』의 내용에 영향을 받아서 생각하면 되고, 『삼국지』를 안 읽은 사람은 다른 것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된다. 또 읽었다고 그 내용을 활용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이런 당위성은 『삼국지』뿐만 아니라 다른 책들, 동서양 책들, 고전이나 현대서 등등, 사진집이나 소설이나 수필이나 만화나... 기타등등을 떠나서 뭐든지 상관없는 것이다.
귀여니 소설들을 나도 쓰레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시 난 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소설책을 읽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너무 많이 읽는 것은 시간낭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적정량이라면 읽어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가치관, 이런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이런 패러다임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구나'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귀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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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놀고 싶어요 인장님..ㅠ_ㅠ
누가 저좀 놀게 해주세요오오오오오오~!!
같이 놀아욤...^*^
비밀댓글 입니다
결국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사람이군요 ^^
하지만 세상 사람 모두가 위대한 사람이지 않은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속이고, 자신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이겠죠..
알고있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실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위인들은 정말 위대한 사람이지 않나 싶어요
네.
저도 맹자의 글을 볼 때마다 저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요.
그런데 막상... 스스로는 잘 모르겠어요. ^^;;